[데스크 칼럼] 허점 많은 한국형 슬롯 꽁 머니

이상열 증권부장
퇴직연금 슬롯 꽁 머니이 1년간 시범운영을 거쳐 지난달부터 국내에서도 본격 시행됐다. 연금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미리 정해진 상품(슬롯 꽁 머니 상품)에 자동 투자되는 제도다.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는 뜻으로, 강압이 아니라 부드러운 개입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넛지(nudge) 이론에 기반한다. 금융지식이 낮은 일반인이 퇴직연금을 방치해 놨을 때 운용 지시 권한을 전문가(연금사업자)가 슬쩍 넘겨받도록 해 수익률 제고를 추구한다. 미국, 영국, 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슬롯 꽁 머니을 적극 시행해 지난 10년간 연평균 8~9% 수익률을 거둬 효과를 입증했다.

한국도 슬롯 꽁 머니 본격 시행으로 2017~2021년 연평균 1.94%에 불과했던 퇴직연금 수익률이 크게 개선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금융회사들도 수익률이 높은 쪽으로 연금자산이 대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자사 슬롯 꽁 머니 상품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적립금 방치 가능성 여전

하지만 국내 슬롯 꽁 머니이 연금 선진국처럼 제대로 작동할지는 두고봐야 한다. 연금 선진국에서의 제도 성공 요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곳곳에 남겨둔 채 시행되고 있어서다. 슬롯 꽁 머니에 가는 경로부터 길다. 해외는 ‘가입자의 운용 미(未)지시 → 슬롯 꽁 머니 발동’ 2단계만 있지만 한국은 독특하게도 이 앞에 ‘가입자의 슬롯 꽁 머니 상품 사전지정(선택)’ 단계를 추가했다. 투자 손실에 대한 책임 논란을 확실히 없애겠다는 취지지만 사전지정을 하지 않으면 슬롯 꽁 머니이 발동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슬롯 꽁 머니을 발동하지 않으면 적립금은 이자가 매우 낮은 고유계정(현금성자산)에 계속 방치된다. 방치된 적립금의 수익률 제고라는 슬롯 꽁 머니 도입 취지를 스스로 훼손하는 대목이다.

사전지정 대상 상품이 초저위험(원리금보장)부터 고위험 포트폴리오까지 6~7개인 점도 ‘선택 최소화’라는 슬롯 꽁 머니 기본 원리에 반한다. 대부분의 연금 선진국이 근로자가 슬롯 꽁 머니 상품 한 개만 선택할 수 있게 한 것과 대비된다.

슬롯 꽁 머니 비중 낮춰야

예금 등 원리금보장형을 포함한 것은 더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법 개정 논의 때 은행·보험사의 주장이 관철된 결과다. 한국 슬롯 꽁 머니이 실적배당상품만 허용한 미국·영국·호주 대신 원리금보장형도 인정한 일본 모델에 가까워진 이유다.국내 퇴직연금 수익률이 연 1~2%대에 머문 건 적립금의 85% 이상이 원리금보장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슬롯 꽁 머니에도 원리금보장형이 남게 되면서 이런 트렌드가 굳어질 기반이 마련됐다. 실제 작년 11월부터 올 6월까지 시범운용 기간 슬롯 꽁 머니 가입 금액의 85%는 여전히 원리금보장형으로 몰려간 것으로 파악된다.

작년 이후 금리 급등으로 원리금보장형도 당분간 연 3~4% 수익률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구조로는 내년 이후 금리 하락기가 오면 퇴직연금은 다시 ‘쥐꼬리 수익률’로 회귀할 공산이 높다. 슬롯 꽁 머니 도입 후에도 가입자 70% 이상이 원리금보장형에 머물러 수익률 제고에 실패한 일본의 전철을 한국이 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형 슬롯 꽁 머니도 ‘성공적 넛지’가 되기 위해선 원리금상품 투자 비중 제한 등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