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추격 뿌리친 슬롯 꽁 머니의 24시간 3교대 ‘나이트호크 부대’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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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꽁 머니, 세계 1위의 비밀대만 슬롯 꽁 머니는 세계 1등 반도체 위탁생산업체(파운드리)다. 애플 아이폰에 들어가는 칩부터 인공지능(AI) 훈련에 필요한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까지 모두 슬롯 꽁 머니에서 만든다.
린훙원 지음
허유영 옮김/생각의힘
496쪽|2만5800원
1987년 설립됐을 때, 이 같은 미래를 예상한 이는 없었다. 슬롯 꽁 머니가 1994년 상장하자 대만 정부는 보유 주식을 상당 부분 매도했다. 설립 때 출자했던 네덜란드 전자회사 필립스는 2008년 슬롯 꽁 머니 지분을 전량 처분했다.1990년대 같은 대만 파운드리인 UMC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2010년대에는 삼성전자와 인텔과 맞붙었다. 특히 2014년 12월 삼성전자가 14나노 핀펫 공정이 양산 공정에 진입했다고 발표한 것은 커다란 위협이었다. 당시 슬롯 꽁 머니의 주요 공정 기술은 16나노였다. 1년 후면 삼성에 14나노 주문을 빼앗길 것으로 예상됐다. 인텔도 10나노 기술 개발을 먼저 시작한 상태였다.
<슬롯 꽁 머니, 세계 1위의 비밀은 슬롯 꽁 머니의 성장 과정을 다룬 책이다. 약 30년 동안 반도체 산업을 취재한 대만 언론인 린훙원이 썼다. 자국 기업인 슬롯 꽁 머니를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대만 반도체 산업이 세계 최고라는 국수주의적 태도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대만에서도 지난해 출간된 이 책은 미·중 반도체 전쟁, 슬롯 꽁 머니의 미국 공장 건설 등 최근 상황까지 빠짐없이 다룬다.
2014년 삼성의 추격을 받았을 때 슬롯 꽁 머니 창업자 모리스 창은 ‘나이트호크 프로젝트’를 꺼내 들었다. 반도체 연구·개발(R&D)을 24시간 3교대로 하는 프로젝트였다. 반도체 생산은 24시간 연중무휴로 돌아가지만, R&D의 24시간화는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 처음 시도하는 일이었다.반발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슬롯 꽁 머니에서 R&D는 ‘연구’보다 ‘개발’에 방점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이 가능하다고 봤다. 파격적인 조건도 내걸었다.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근무하는 ‘저녁조’는 연봉의 15%를 추가 지급했다. 밤 11시에 출근해 다음날 오전 10시에 퇴근하는 ‘야간조’는 연봉의 30%를 추가로 주고, 연말 성과급도 50% 더 얹어줬다.저자는 슬롯 꽁 머니에 앞서 대만 전자산업의 강점을 노동자의 근면성과 초과 노동, 저렴한 인건비에서 찾는다. 덕분에 대만은 이윤이 적다고 꺼리는 제품들도 기꺼이 생산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바닥부터 차근차근 기술을 습득해 가며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으론 ‘종업원 주식 배당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슬롯 꽁 머니 기업들에 1980년 도입돼 2008년 폐지된 이 제도는 직원들에게 주식을 나눠줘 낮은 연봉에 따른 불만을 달랬다. 스톡옵션과 비슷하지만 액면가에 주식을 나눠주고, 거의 모든 직원이 주식을 받는 점이 다른 점이다.슬롯 꽁 머니가 잘 나가지만 대만의 분위기가 마냥 밝은 것은 아니다. 몇몇 기업을 빼면 절대다수의 반도체 기업은 하락세를 면치 못한 채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스타트업 등 새로운 혁신 기업의 등장도 활발하지 않다. 슬롯 꽁 머니에 대해서도 군대식 문화, 인색한 직원 복지, 낙후된 소프트웨어, 너무 긴 회의 시간 등이 문제로 지적된다.
슬롯 꽁 머니와 대만 전자산업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잘 다룬 책이다. 무작정 자국 기업과 산업을 찬양하기보다 빛과 그림자를 균형감 있게 전달한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