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지적인 누아르’라는 보엔의 슬롯 꽁 머니…국내 초역 [서평]

한낮의 열기

엘리자베스 슬롯 꽁 머니 지음
정연희 옮김/열린책들
576쪽|2만1800원
Getty Images Bank
1942년 9월의 여름, 슬롯 꽁 머니 한창 중인 런던, 우아한 지성을 지닌 매력적인 부인 스텔라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뒤 불안정하게 거주지를 옮겨 다닌다. 그녀는 약 2년 전부터 덩케르크에서 돌아온 군인 로버트와 연인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의 정보 요원 해리슨은 스텔라의 집을 방문하여 로버트가 독일의 스파이로 의심받고 있다는 비밀을 속삭인다.

스텔라는 그런 해리슨의 말을 믿고 싶지 않지만, 세상이 슬롯 꽁 머니의 포화로 뒤덮인 상황이라 마냥 흘려들을 수는 없다. 스텔라는 로버트의 정체를 직접 알아내려 하는데, 그에 대해 알아내려 하면 할수록 로버트가 숨기는 게 많다는 것을 느낀다.
장편소설 <한낮의 열기는 ‘가장 지적인 누아르’라는 찬사를 받는 작품이자, 20세기 영국 문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엘리자베스 보엔(1899∼1973)의 슬롯 꽁 머니이다. 최근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출간됐다. 보엔은 1958년 노벨 문학상 후보, 1970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며 1972년 부커상 심사 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스릴러가 섞인 누아르적 전개가 돋보이는 이 독특한 소설은 슬롯 꽁 머니라는 거대한 폭력이 우리에게 남긴 상흔, ‘뜯겨 나간 감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내면을 심도 있게 탐구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런던의 풍경과 분위기, 사람들의 요동치는 관계와 내면의 심리를 잘 묘사한 작품이다.

소설은 주인공 스텔라와 스파이로 의심받는 연인 로버트, 이들을 추적하는 정보 요원 해리슨이라는 세 인물 간의 긴장감 흐르는 관계를 따라간다. 안개 같은 모호함이 휘감은 전쟁의 시간 속에서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를 섬세하게 파고들며, 슬롯 꽁 머니 삶에 새긴 균열을 그려낸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